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진숙 위원의 대통령 부모 묘소 참배를 두고 야당이 ‘막장 정치‘라 규탄하며 연일 포화를 퍼붓고 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공직자의 처신과 예의, 언론의 독립성이라는 해묵은 도덕률을 끄집어내며 양측의 볼썽사나운 공방을 한탄한다. 마치 우리 정치가 한때는 고결한 공공선과 숭고한 도의에 기반해 작동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여야가 늘어놓는 분노의 수사학은 온갖 감상적 휴머니즘으로 포장되어 대중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러나 공익과 품격을 읊조리는 이 모든 분노는 텔레비전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꺼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연출된 제스처에 불과하다.
정치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국민’과 ‘상식’이라는 레토릭은 권력 투쟁의 비열함을 가리기 위한 얇은 비단옷일 뿐이다. 고위 공직 후보자가 상징 권력의 발원지를 찾아 충성을 맹세하든, 반대파가 이를 패륜과 결탁이라 매도하든, 그 내막에는 공공의 이익에 대한 일말의 진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은 이들이 연출하는 분노의 스펙터클을 보며 진영 논리에 취해 분개하지만, 실상 그것은 지지층의 말초적 도덕 감정을 땔감 삼아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고도의 미디어 영업이다. 도덕의 언어로 덧칠된 공방이 치열해질수록, 체제의 실질적 결함과 피폐해진 민생의 구조적 모순은 완벽하게 은폐된다.
조선의 건국공신 정도전은 정치를 규정하며 “누구에게서 빼앗고 누구에게 나누어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뇌하는 배분의 기술”이라 갈파했다. 정사의 본질은 자원의 한계 속에서 권력의 칼을 쥐고 고통을 분담시키는 처절한 결단의 영역이어야 마땅하지만, 오늘날 여야가 벌이는 막장 정치의 아수라장에는 이 비장한 본질이 철저히 거세되어 있다. 정책에 대한 고뇌와 사회적 잉여의 재분배는 증발했고, 오직 자극적인 쇼와 알고리즘 친화적인 인기몰이, 그리고 자신들의 특권을 보존하기 위한 기득권 카르텔의 밥그릇 챙기기만 남았다. 국가의 명운을 쥔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 중 권력의 본원적 책무를 자각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벌거벗은 힘의 논리와 사적 이권만이 그들의 유일한 복음이다.
따라서 도덕적 잣대로 이 난장판을 재단하며 정치의 타락을 탄식하는 것은 현실 정치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순진한 낭만주의에 불과하다.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이미 ‘정책의 시장’이 아니라 승자독식의 권력 배분을 정당화하는 ‘적대적 공생의 극장’으로 전락했다. 묘소 참배라는 원초적 상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혈투는 시스템의 붕괴를 알리는 징후가 아니라, 파이가 줄어든 체제 안에서 더 많은 지분을 약탈하기 위해 기득권 세력이 벌이는 필연적인 적자생존의 진흙탕 싸움이다. 이 냉혹한 힘의 역학을 간파하지 못한 채 정치권의 위선적 분노에 감정을 의탁하는 유권자는 권력 카르텔의 배를 불리는 무기력한 관객으로 소모될 뿐이다.
결국 주권자가 취해야 할 유일하게 유효한 생존 법칙은 정치권이 주입하는 도덕적 서사를 완전히 탈색하고 이들을 차가운 ‘자원 배분의 용역업자’로 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부모의 묘소를 찾든 막장 정치라는 비난을 퍼붓든, 그 천박한 연극 뒤에서 은밀하게 거래되는 예산의 흐름, 규제의 방향, 기득권의 담합을 냉정하게 추적해야 한다. 정치는 신념의 성소가 아니라 탐욕과 지분이 교환되는 도살장이다. 분노를 거두고 그들의 손끝이 향하는 실질적인 권력의 동선을 차갑게 응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쇼 비즈니스로 전락한 정치의 인질극에서 벗어나 생존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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